◎ 슬프고 짜증났던 상황
1. 신문배달을 하면서 가장 짜증나는 때가 태풍이 불때였다. 비오는 것도 싫었지만 태풍은 강풍을 동반하기 때문에 그로인한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였기 때문이다. 비가 오면 신문을 접어서 비닐에 껴놓은채로 배달하게 되는데 모든 신문을 그렇게 하진 않는다. 비로 인해 꼭 신문이 젖을 수 밖에 없는 집에만 그렇게 하고 나머지는 그냥 자전거 바구니에 신문을 통채로 비닐로 덮은채로 담는다. (아파트나 실내로 배달하는 곳이 그러하다)
어느 태풍날, 거의 배달이 완료되고 20여부정도 남았던 것 같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데 경향신문 보급소에 배달할 때였다. (각 신문 보급소마다 다른 신문들이 배달되곤 한다.) 엄청난 강풍이 불고 있었고 난 자전거를 그 보급소 앞에 세워놓고 신문 한부를 들고 보급소 안으로 들어가서 전달해 주었다. 그곳에서 다시 나왔을 때 엄청난 강풍으로 인해 자전거가 넘어졌다. 그리고 비닐로 돌돌 말아놓은 20여부의 신문들이 날리기 시작했다. 정말 단 한부의 신문도 남기지 않고 바람은 신문을 읽고 싶었는지 모조리 하늘로 날려보내고 있었다. 잠시 그 광경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신문이 낱장으로 분리되어 하늘을 날고 있었다. 어떻게 조치할 수가 없었다. 난 한동안 그 장소에 멍하니 서있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역시나 다음날 되었더니 국장님이 신문 20여곳이 안들어갔다고 버럭 화내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2. 새벽에 일어나 신문을 돌리다보면 도로에 차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도로 한중앙을 냅따 자전거로 내지르는 재미를 느끼고는 했다. 그날도 여지없이 도로중앙을 자전거를 몰고 시속 100KM를 돌파하고자 하는 레이싱 충동을 가슴에 머금으며 달리고 있었는데 사거리에서 역시나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던 트럭과 접촉사고가 났다. 둘 다 속도가 엄청나서 하마트면 어린나이에 비명횡사 할 뻔 했으나, 하늘이 도우사 슬쩍 빗맞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자전거는 불구가 되었다. 앞바퀴가 접어져 버렸던 것이다. 그 죽지도 않고 불구가 되어버린 자전거를 끌고 보급소로 들어갔고 보급소에서 신문을 받아 자전거를 들고 배달했다. 뒤지는 줄 알았다. 팔꿈치가 약간 욱씬거렸는데 그건 중요한게 아니였다. 신문의 양이 많았기 때문에 손으로 들고 배달할 수가 없어 자전거 바구니에 신문을 담고 그 자전거를 들었다.
짜증이 엄청나면 억울해지게 되고 억울이 짙어지면 눈물이 나더라..
◎ 기분좋았던 상황
1. 앞서 얘기하였듯이 의료원에 신문을 돌리다보면 그 새벽에도 환자들의 가족들이 잠을 자지 않고 있는 경우를 자주본다. 어느날 영안실에 신문을 넣고 올라와 2층 수술실로 향하던 중, 한 남녀 한쌍을 보았다. 환자의 보호자로 보였다. 비옷을 입고 조그마한 애가 신문을 배달하는 것이 가여워보였는지 날 불러 세우더니 신문을 하나 팔라고 했다. 난 내가 볼 신문을 하나 추가로 늘 들고 다녔기 때문에 그 신문을 팔려고 했다.
보호자 : 얼마니?
나 : 300원이요
보호자 : 어린게 고생이 많구나.. 자 여기 천원 받아라
어라? 이거 신기했다. 내가 보던 신문을 팔았더니 보통 300원 하는 신문을 1,000원을 주고 팔았다. 그 이후로 난 보급소에서 늘 5부정도의 여유 신문을 몰래 더 들고 나왔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는 더 열심히 뛰었다. 그랬더니 간혹 신문을 사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여성분과 남성분이 같이 있을때 더 열심히 하는척 했다. 그럼 여성분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남자를 시켜 신문을 사도록 종용했다. 그리고 남자가 떡하니 500원을 준다. 그럼 바로 여성분이 혼을 낸다. 2,000원 줘욧!! 그럼 2000원을 주는 사람도 있었다.(젊은 사람들이 보통 그런다) 하루는 신문을 10부정도 더 들고 나왔는데 이 10부를 다 팔았을 때, 내 월급이 당시 3만원 정도 였는데 그날 하루 10,000원을 벌었을 때, 내 배달역사상 그렇게 기분좋았던 날은 없었던 것 같다.
2. 남원역에도 신문을 넣었었다. 역 옆에 조그마한 관사가 하나 있었는데 여기가 새벽에는 그렇게 어두울 수가 없었다. 그래도 여기를 좋아했던 이유가 하나 있었는데 평소에는 어두운 곳에서는 자전거 앞바퀴에 달린 라이트를 켰지만 여기서는 그러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왜냐하면 여긴 반딧불 집단 서식지였다. 라이트를 끄고 관사 앞마당으로 자전거를 몰고 들어가면 반딧불이 꽁무니에 불을 켜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정말 이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요즘엔 정말 반딧불 보기가 힘든 것 같다.
3.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겨레와 경향신문의 진가가 드러나는 것 같다. 특히 조중동에 맞서 정론지로서 부각되는 모습을 보면 그리고 촛불집회때 사람들이 한겨레신문을 나눠주는 모습을 보면서 기분이 좋아진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저 어렸을 때 한겨레 신문 배달했습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시작한 신문배달이였으나 지금은 추억이 되기도 했고 내가 돌렸던 한겨레 신문이 좋은 평가를 받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으랴..
참고로 내 동생은 스포츠 조선을 돌렸다. ㅋㅋ
1. 신문배달을 하면서 가장 짜증나는 때가 태풍이 불때였다. 비오는 것도 싫었지만 태풍은 강풍을 동반하기 때문에 그로인한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였기 때문이다. 비가 오면 신문을 접어서 비닐에 껴놓은채로 배달하게 되는데 모든 신문을 그렇게 하진 않는다. 비로 인해 꼭 신문이 젖을 수 밖에 없는 집에만 그렇게 하고 나머지는 그냥 자전거 바구니에 신문을 통채로 비닐로 덮은채로 담는다. (아파트나 실내로 배달하는 곳이 그러하다)
어느 태풍날, 거의 배달이 완료되고 20여부정도 남았던 것 같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데 경향신문 보급소에 배달할 때였다. (각 신문 보급소마다 다른 신문들이 배달되곤 한다.) 엄청난 강풍이 불고 있었고 난 자전거를 그 보급소 앞에 세워놓고 신문 한부를 들고 보급소 안으로 들어가서 전달해 주었다. 그곳에서 다시 나왔을 때 엄청난 강풍으로 인해 자전거가 넘어졌다. 그리고 비닐로 돌돌 말아놓은 20여부의 신문들이 날리기 시작했다. 정말 단 한부의 신문도 남기지 않고 바람은 신문을 읽고 싶었는지 모조리 하늘로 날려보내고 있었다. 잠시 그 광경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신문이 낱장으로 분리되어 하늘을 날고 있었다. 어떻게 조치할 수가 없었다. 난 한동안 그 장소에 멍하니 서있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역시나 다음날 되었더니 국장님이 신문 20여곳이 안들어갔다고 버럭 화내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2. 새벽에 일어나 신문을 돌리다보면 도로에 차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도로 한중앙을 냅따 자전거로 내지르는 재미를 느끼고는 했다. 그날도 여지없이 도로중앙을 자전거를 몰고 시속 100KM를 돌파하고자 하는 레이싱 충동을 가슴에 머금으며 달리고 있었는데 사거리에서 역시나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던 트럭과 접촉사고가 났다. 둘 다 속도가 엄청나서 하마트면 어린나이에 비명횡사 할 뻔 했으나, 하늘이 도우사 슬쩍 빗맞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자전거는 불구가 되었다. 앞바퀴가 접어져 버렸던 것이다. 그 죽지도 않고 불구가 되어버린 자전거를 끌고 보급소로 들어갔고 보급소에서 신문을 받아 자전거를 들고 배달했다. 뒤지는 줄 알았다. 팔꿈치가 약간 욱씬거렸는데 그건 중요한게 아니였다. 신문의 양이 많았기 때문에 손으로 들고 배달할 수가 없어 자전거 바구니에 신문을 담고 그 자전거를 들었다.
짜증이 엄청나면 억울해지게 되고 억울이 짙어지면 눈물이 나더라..
◎ 기분좋았던 상황
1. 앞서 얘기하였듯이 의료원에 신문을 돌리다보면 그 새벽에도 환자들의 가족들이 잠을 자지 않고 있는 경우를 자주본다. 어느날 영안실에 신문을 넣고 올라와 2층 수술실로 향하던 중, 한 남녀 한쌍을 보았다. 환자의 보호자로 보였다. 비옷을 입고 조그마한 애가 신문을 배달하는 것이 가여워보였는지 날 불러 세우더니 신문을 하나 팔라고 했다. 난 내가 볼 신문을 하나 추가로 늘 들고 다녔기 때문에 그 신문을 팔려고 했다.
보호자 : 얼마니?
나 : 300원이요
보호자 : 어린게 고생이 많구나.. 자 여기 천원 받아라
어라? 이거 신기했다. 내가 보던 신문을 팔았더니 보통 300원 하는 신문을 1,000원을 주고 팔았다. 그 이후로 난 보급소에서 늘 5부정도의 여유 신문을 몰래 더 들고 나왔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는 더 열심히 뛰었다. 그랬더니 간혹 신문을 사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여성분과 남성분이 같이 있을때 더 열심히 하는척 했다. 그럼 여성분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남자를 시켜 신문을 사도록 종용했다. 그리고 남자가 떡하니 500원을 준다. 그럼 바로 여성분이 혼을 낸다. 2,000원 줘욧!! 그럼 2000원을 주는 사람도 있었다.(젊은 사람들이 보통 그런다) 하루는 신문을 10부정도 더 들고 나왔는데 이 10부를 다 팔았을 때, 내 월급이 당시 3만원 정도 였는데 그날 하루 10,000원을 벌었을 때, 내 배달역사상 그렇게 기분좋았던 날은 없었던 것 같다.
2. 남원역에도 신문을 넣었었다. 역 옆에 조그마한 관사가 하나 있었는데 여기가 새벽에는 그렇게 어두울 수가 없었다. 그래도 여기를 좋아했던 이유가 하나 있었는데 평소에는 어두운 곳에서는 자전거 앞바퀴에 달린 라이트를 켰지만 여기서는 그러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왜냐하면 여긴 반딧불 집단 서식지였다. 라이트를 끄고 관사 앞마당으로 자전거를 몰고 들어가면 반딧불이 꽁무니에 불을 켜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정말 이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요즘엔 정말 반딧불 보기가 힘든 것 같다.
3.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겨레와 경향신문의 진가가 드러나는 것 같다. 특히 조중동에 맞서 정론지로서 부각되는 모습을 보면 그리고 촛불집회때 사람들이 한겨레신문을 나눠주는 모습을 보면서 기분이 좋아진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저 어렸을 때 한겨레 신문 배달했습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시작한 신문배달이였으나 지금은 추억이 되기도 했고 내가 돌렸던 한겨레 신문이 좋은 평가를 받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으랴..
참고로 내 동생은 스포츠 조선을 돌렸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