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우리집은 가난했었지~
남들 다하는 외식 한번 해본 적 없었고~
GOD의 ‘어머님께’라는 곡이 꼭 나를 얘기하는 것만 같았던 그시절 지독히도 가난한 탓에 어려서부터 많은 일을 해야 했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신문배달을 시작으로 대학때까지 수도 없이 많은 아르바이트로 하루하루 살아가야 했던 그 시절~ 돈이 되는 일은 뭐든 했다. 특히 군대 제대하고 나서 복학한 뒤에는 노가다만한게 없더라. 그래서 학원 강의라는 고수입 알바를 하기 전까지 학교 수업이 없는 토, 일요일이나 쉬는 날에는 새벽바람을 가르며 인력사무소에 죽치고 앉아 있었다. 하루 일당이 6~7만원이니 웬만한 알바보다 훨씬 낫다. 매일 하는 것도 아니고. 인력사무소에서 했던 많은 일들 중 대부분이 건설현장에서 자재 치우는 것이나 청소, 곰빵 이런 것인데 그마나 건설현장 일은 낫다. 어떤 일들은 정말 다시는 하기 싫은 일들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일이지만 잠시 추억을 회상하며 내 생애 최악의 일용직 알바 Best 3를 소개해본다.(인력사무실에서 파견 나간 일에 한정함)
3위. 벽돌 나르기
인력사무소에서 일을 나갈 때는 나 혼자 나가는 일이 두렵다. 전체적인 일 양이 많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지만 나 혼재 해야 하는 일이 많다라는 뜻이기도 하다. 차를 타고 1시간을 넘게 이동한 한적한 곳. 너른 들판에 조적조 집을 짓는 모양이였다. 처음에는 이 집터가 작아 보였다. 이미 1층 슬라브는 조성되어 있었고 방수턱까지 설치되어 있었으니 벽체를 벽돌로 쌓으면 되는 일이였다. 물론 나의 일은 벽돌을 나르는 일이다. 벽돌야적장이랑 현장이랑 30m 정도 떨어져 있고 약간 경사져 있었다. 평소 나의 강인한 체력을 믿고 있었고 오늘 시공할 물량이 많지 않아 보여 쉽겠다라고 착각하였다.
벽돌 나르는 사람 나 혼자. 벽돌 쌓는 사람 기공, 조공 합쳐서 7명. 끊임없이 벽돌을 조달해야 한다. 말 그대로 SCV가 된 듯 했다. 한 2시간 지나니 체력이 고갈나기 시작했다. 벽돌을 손수레에 50여장을 담고 달려야 한다. 그래야 물량을 조달할 수도 있지만 경사진 곳을 올라가기 위한 추진력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러니 내 체력을 두시간을 못버텼다. 오전 9시인데 진심으로 집에 가고 싶었다. 너무 힘들었다. 아마 여기가 시내권이였다면 돈이고 나발이고 가버렸을텐데 차도 없고 어딘지도 모르고… 이 분들이 태워다 줄 때만이 귀가가 가능한 상황이였다. 내가 지친 기색을 보이자 오야지가 성질을 내기 시작한다.
“뭐여~ 시방 뭐 했다고 골골거리는겨? 허리허고 배에따가 힘 꽉주고 움직이랑께?”
자존심이 상했지만 영화에서처럼 자존심이 상한 주인공이 괴력을 발휘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 수레를 밀고 있는 자가 나인지 내가 수레인지 라는 혼돈의 의식 속에서 1초 1초를 버텨가고 있었다. 근데 이 사람들 하루만에 벽돌을 다 올리더라. 내가 학교에서 배울 때는 하루에 벽돌을 쌓는 단수가 1.5m 이하인데 이 양반들 단 하루에 1층을 완성해버리다니… 학교에서 배운거 현장에서 안쓰더라…. (1.5m 이하로 시공할 경우 그날 시공량이 그리 많지 않다고 판단했음)
점심을 먹고 오후 2시쯤 거의 반 시체가 되어 벽돌을 나르는 건지 벽돌이 나를 나르는 것인지 경계가 애매한 상태가 되어 갈 때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이미 오후이고 비가 와서 작업을 못하면 하루 일당은 다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집에 일찍 간다라는 생각이 날 즐겁게 했다. 작업자들은 한 30분 정도 쉬더니 역시 오야지가 말한다.
“야~ 그냥 허자~”
그렇게 난 비를 맞고 끝날 때까지 벽돌을 날랐고 그냥 저녁 파스를 사왔지만 자취방에서 파스를 펼쳐놓고 팔이 올라가지 않는 관계로 어깨에 파스를 못붙이고 그냥 잤다. 그리고 3일을 앓았다.
2위. 양파 농장
어려서 시골에서 자랐지만 농사를 짓고 살진 않았다. 그래도 옆집, 뒷집 많은 분들이 농업에 종사를 하고 있었기에 농사일을 잘 안다라고 착각했던 거 같다. 인력사무소에서 농장에서 양파 수확물 창고에 쌓는 일 한다고 나를 포함 3명을 차에 싣고 달려갔다. 처음에는 우왕~ 오늘 일 쉽겠다.라고 생각했다. 당시 내가 너무 낭만주의자였다랄까. 땀흘려 수확한 농작물을 불끈 들쳐없고 허허허 웃으며 수건으로 땀을 닦는 나를 상상했고 아주 조그마한 창고에 양파를 쌓는 모습에 흐뭇해하는 우리 알바단과 소탈해 보이는-새마을 모자를 쓴- 전형적인 이장님 스타일의 주인아저씨를 상상했다.
일하는 장소에 도착하니 일단 창고가 내가 생각한 창고가 아니다. 저정도 규모면 경부고속도로 타고 가다 안성근처에서 보이는 물류창고의 느낌이랄까. 그러면서 주인장이 하는 말,
“오늘 다마네기 저기다 다 채우면 되는거여잉~”
그리고 그 창고 뒤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양파망에 담긴 양파들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우리의 무기는 외발 수레와 반코팅장갑.
양파망 하나는 가볍다. 그런데 가벼운만큼 움직임이 많다. 양파를 잡아서 창고위로 보내는 단순하고도 반복적인 작업이 초당 1회씩 실시된다. 가끔 일을 바꿔 넘실거리는 양파를 외발 수레에 담아 창고로 옮기는 것도 하는데 우리 주인장님은 두 손이 보이지 않게 움직이시면서 소리를 지른다.
“빨리빨리~ 뭐혀~ 해넘어가~”
오전이 지났을 뿐인데 내 팔은 흐느적거렸다. 밥을 먹으려는데 수저가 손에는 붙어있으나 내 입으로 올라오진 않았다. 내 몸을 흔들었더니 어깨에 붙어있는 팔 두 개가 휘리릭~ 휘리릭~ 흔들거린다. ‘아.. 내가 병신이 됐구나..’ 라고 생각했다. 오후가 되자 일의 강도는 더욱 늘어났다. 농장주인장의 횡포는 극에 달했다. 물론 그분도 같이 우리랑 일을 했지만 흡사 그분은 터미네이터와 같았다. 마치 채찍을 들고 노예들이 돌을 끌고 갈 수 있도록 재촉하는 이집트 피라미드 축조 관리자 같았다. 그와중에 힘들었던 것은 창고에 먼지가 가득했던 것이다. 숨조차 쉬기가 힘든 곳이였다. 우리가 마스크를 좀 달라고 했더니 그 피라미드 건설 관리자는 이렇게 말했다.
“마셔~ 다마네기 먼지는 보약이여 보약~ 남들은 없어서 못마셔~”
‘전 안먹어도 괜찮아요~ ㅜㅜ’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열심히 마셔줬을 뿐이였다. 팔은 이미 내 팔이 아니였다. 양파를 옮기는 팔에도 감각이 없고 수레를 움직이는 팔도 감각이 없다. 먼지로 인해 눈과 목은 아프고 땀은 맵고 해는 뉘엿뉘엿 져가는데 피라미드 건설 관리는 속도를 높혔다. 그분은 철인 3종 나가시면 분명 상위권이실 것이다. 이 날 이후 인력사무소를 3일간 못나갔다. 몸살이 나서.. 농부님들 존경합니다. 이 일을 한 뒤 한동안 나는 양파를 멀리했다. 요즘도 가끔 차를 타고 도로를 달리다가 내 차 옆으로 양파를 가득 실은 차가 지나가면 흠칫한다.
1위. 음식물 쓰레기 처리장
내 생애 가장 빡세고 공포스런 일이였다. 이 일을 하게 되었던 날도 여느 날과 다를게 없었다. 다만, 새벽에 비가 조금 내려 오늘 일이 없으려나 하던 찰라에 갑자기 10명의 인부가 필요하다는 전화에 인력사무소에 있던 많은 이들이 고무되어 승합차를 타고 떠났다. 그 곳은 인력사무소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공장지대였다. 나는 평소 그 옆길을 다니다가 아 저기가 음식물 쓰레기를 모아 놓는데구나 라고 생각했던 곳에 내가 가게 될 지는 꿈에도 몰랐다.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음식쓰레기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 승합차가 도착하자 공장관계자가 우리를 데리러 나오자마자 우리 10명중 4명은 ‘집에 갈래요’ 이런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하는 말이,
“나 여기서 일해봤어. 뒤져~ 뒤져. 못해~”
두둥~ 나는 이게 뭔 일이래 하면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하길래… 그러는 사이 4명은 다시 돌아갔다. 공장관계자는 한숨을 한번 쉬더니
“하아~ 자. 또 집에 가실 분 있나요?”
집에 간다는 사람이 없자 우리를 이끌고 공장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음식물 쓰레기를 수거하여 처리하는 곳이였다. 일부는 건조시키거나 일부는 부패시키거나 해서 2차 부산물을 만들어내는 곳이였다. 이런 저런 설명을 하더니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새벽에 갑자기 기계가 고장나 그걸 고치기 위해 부패시키고 있던 음식물 쓰레기를 퍼내야 한다는 것이였다. 대부분은 장비로 퍼냈으나 깊숙한 곳 어두운 아래에 담겨있는 음식물을 퍼내야 한다고 했다 깊이는 1.5M 정도, 이 얘기를 듣고 남아있는 6명 중 2명이 집에 갔다. 공장 관계자는 일당을 10만원으로 올렸다. 그래서 10만원의 노예가 된 나를 포함한 4명이 작업을 착수했다. 작업현장을 보니 사람두명 정도 들어갈 구멍이 바닥에 뚫려 있고 그 안에 음식물 쓰레기가 가득했다. 이미 악취로 인해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였다. 마스크를 받고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공장관계자 양반이 가슴까지 올라오는 고무 장갑을 가져왔다.
‘아… 저기 들어가라고…’ 2명이 들어가서 바케스에 저걸 담아 위로 올리는 작업이다. 먼저 키가 큰 아저씨들이 들어가서 작업을 했다. 오우 쉣~ 그 비주얼이란 다시 생각해도 끔직하다. 거기서 나오는 유독가스로 인해 20분이상 작업을 하지 않았다. 20분 작업에 20분 휴식이다. 중간에 교대를 하는데 내가 들어갔더니 음식물 쓰레기가 내 가슴까지 올라온다. 입으로 숨을 쉬어도 냄새로 인해 그리고 가스로 인해 머리가 띵하다. 너무 높게 차 있으니 양동이를 위로 올리는게 좀 어정쩡해 가끔 머리 위로 흘러내린다. 윽~
새참이나 밥도 잘 못먹는다 온몸에서 진동하는 음식물 삭힌 냄새들로 인해 다들 밥도 제대로 못먹는다. 또 땀은 어찌나 흐르던지.. 팬티까지 젖을 정도로 땀을 흘렸다. 오후 4시경 되자 바닥이 보였다. 우리는 일당 10만원을 받고 목욕비로 2만원을 더 받아서 집에 갔다. 그리고 한 3일간 밖을 나가지 못했다. 냄새가 가시질 않았다.
이상이 내 생애 최고로 힘들었던 알바였고 이 외의 것을 언급하자면, 지금은 거의 없어진 결혼식 피로연 식당 알바, 요즘에는 대부분 뷔페식으로 식사를 하기도 하고 전문 케이터링 서비스 업체가 준비하지만 예전에는 지인들이 이 일을 하거나 알바를 고용했다. 이 일은 거의 죽음의 점심시간을 보내게 된다. 허리를 펼 시간이 없다. 정신도 안드로메다로 떠나보내고 그릇 치우고 다시 상 차리고 그릇 치우가 상 차리고 무한 반복. 그렇게 일하고도 받는 돈은 쥐꼬리~
오랜만에 추억으로 남은 빡센 알바를 회상해보았습니다.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편하고 많이 벌고… 사회적 지위도 있고.. 그렇네요.
세상의 모든 알바여~ 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