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점성술사이자 첫 천체물리학자라고 불리는 요하네스 케플러는 행성의 궤도와 운동을 아름답게 정리한 케플러 법칙(Kepler’s laws of planetary motion)을 만든 위대한 천체물리학자입니다.
케플러 법칙
케플러의 행성 운동 법칙이라고 불리는 케플러 법칙은 이미 우리에게 너무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학교 교과과정을 통해서도 케플러의 법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케플러 법칙은 3가지입니다. 아래에서 이 법칙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보세요.
- 케플러 제 1법칙 : 타워 궤도의 법칙. 행성은 타원을 궤도로 공전하고 타원 궤도의 두 초점 중 한 곳에 항성이 존재한다는 법칙.
- 케플러 제 2법칙 : 면적 속도 일정의 법칙. 항성과 행성을 연결하는 선분이 같은 시간 동안 지나면서 만들어지는 면적은 일정하는 법칙.
- 케플러 제 3법칙 : 조화의 법칙. 행성의 공전 주기의 제곱은 그 행성의 타원 궤도 긴 반지름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법칙.
케플러 법칙은 단순함 속에 행성 운동의 핵심을 담았습니다. 케플러는 어떻게 이 공식들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일까요? 케플러의 삶과 업적을 알아보면서 케플러의 공식이 만들었던 때를 얘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하네스 케플러의 삶과 연구
병약하지만 영리했던 케플러의 어린 시절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50)는 1571년 12월 27일, 바일데어슈타트의 제국자유도시에서 칠삭둥이 미숙아로 태어났습니다. 그 영향인지 케플러는 어린 시절 병약한 아이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영리했고 특히, 수학적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자라면서 신학과 철학을 배웠습니다.(당시에는 누구나 그랬을 것입니다.) 그 와중에 수학과 천문학도 배웠는데 이 분야에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천문학에 열정 넘치던 케플러의 청년 시절
튀빙겐 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지만 수학과 천문학 역시 교과 과정에 있었고 이 시절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과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모두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케플러는 이때부터 지동설을 신봉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가 되려고 했던 바램과는 달리 23세에 수학과 천문학 교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훌륭한 강사는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수강생이 한 명도 없을 정도로 인기가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천문학 연구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 열정적이었습니다. 신학과 천문학을 함께 고려해서 연구했습니다. 물론 현대의 관점에서 볼 때는 비논리적이거나 비과학적인 주장도 많았습니다. 우주를 신의 이미지로 형상화한다던지, 성경 구절과 일치시키기 위해 논리적 비약을 보이기도 했습니다.(당시 많은 과학자들이 그랬습니다.)
자신의 연구를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했고 연구를 지속하기 위해 후원자들을 위한 배려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모로 현대 우리 일반 직장인들과 같았던 것 같습니다.
케플러 법칙을 발견한 중년 시절
케플러는 티코 브라헤와 함께 일하게 되었는데 티코 브라헤와 일하는 과정은 그리 순탄치 않았습니다. 늘 티격태격 부딪히곤 했습니다. 이 시절이 케플러에겐 스트레스였겠지만 결국 티코 브라헤와의 인연 덕분에 케플러 법칙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케플러 법칙을 만들다
티코 브라헤가 죽은 뒤 케플러는 티코 브라헤가 그동안 기록했던 행성 관측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 관측자료에 따르면 지구 궤도가 완전한 원이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원이 아닐 리 없다고 생각했던 케플러는 지구 궤도에서 화성 궤도로 연구를 옮겼습니다.
화성 궤도를 구하기 위해 8년간 연구에 몰두한 끝에 화성의 속도가 당초 예상했던 것처럼 일정하지 않고 태양에 접근할 때 빨라지고 멀어질 때는 느려진다는 케플러의 제2 법칙(면적속도 일정의 법칙)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화성의 궤도가 원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관측결과에서 보인 오차는 화성의 궤도가 원이 아닌 타원이라고 가정하자 오차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케플러 제 1법칙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결과를 가지고 1609년 ‘새로운 천문학’을 출간했습니다. 이후 1618년 케플러는 ‘행성의 공전 주기의 제곱은 행성 궤도의 긴 반지름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내용의 케플러 제3법칙을 담아 ‘우주의 조화’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로써 케플러는 천체 물리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발견을 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불행한 말년
하지만 과학사에 길이 남을 발견을 하고도 말년은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30년 전쟁의 영향으로 케플러의 후원자들이 사라지자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말년에도 돈을 구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이리저리 뛰어다녔야 했습니다.
인류를 위한 큰 공헌을 하셨지만 정작 본인의 삶은 여유롭지 못했습니다. 죽은 후에도 전쟁의 여파로 인해 무덤이 소실되기까지 했습니다.
케플러라고 하면 저 놀라운 행성 운동 법칙이 먼저 떠오르지만 내 삶과 큰 차이가 없는 케플러라는 사람의 짠한 삶도 생각이 나곤 합니다. 케플러는 거대한 행성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밝혀냈지만 인간의 삶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해서는 몰랐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주에서 우리는 작디작은 존재면서도 예측되지 않는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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