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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정보

고종의 길을 걸으며 느껴보는 아관파천

1895년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킵니다. 을미사변은 일본자객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 이후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일본군대의 경복궁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러시아 공사관으로 빠져나오게 됩니다. 이를 아관파천이라고 합니다. 말그대로 임금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을 갔다는 거에요. '고종의 길'이란 임금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던 루트를 말합니다. 최근 이 길이 복원을 통해 개방이 되었어요.


덕수궁과 고종의 길


고종의 길 입구


우리에게는 아픈 역사의 장소입니다. 아관파천으로 고종은 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에서 약 1년을 머물게 됩니다. 일본의 위협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러시아로부터 내정간섭을 받게 되는 것은 물론 삼림채굴권, 광산채굴권을 넘기는 것을 시작으로 서구 열강에 국토를 송두리째 각종 이권을 넘기게 됩니다. 수탈의 역사가 시작되는 시점이기도 해요. 이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것은 국민들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죠.



덕수궁 돌담길

<구 미국 공사관 올라가는 길. 우측 돌담길 내부가 덕수궁>


고종이 길


고종의 길은 현재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습니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구 미국공사관 길을 따라 올라가면 아주 조그만한게 만들어 놓은 '고종의 길'입구와 입간판을 볼 수 있습니다. 아주 짧은 길입니다. 금새 구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착할 수 있어요.




복원된 고종의 길

<복원된 고종의 길>


길을 빠져나와 (구)러시아 공사관을 보니 우리의 수탈의 역사의 큰아픔과는 대조적으로 아름다운 풍경이었어요. 과거의 우리 선조들이 겪었던 아픔과 눈물에 대한 위로였다고 느껴질 정도로 날이 좋았기 때문이었죠. 


유일하게 남아있는 구 러시아 공사관 탑


<현재 남아있는 (구)러시아 공사관 탑>


현재 고종의 길 복원사업은 제대로 된 복원이 아니었다고 비판을 받는 중이고 문화재청도 일부 잘못을 시인하고 있다고 하네요. 조작된 기록으로 기록을 가지고 복원을 했다고 하나봐요. 분명한 것은 19세기 말 고종은 궁을 버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고 이로 인해 서구열강들에게 나라는 수탈을 당하기 시작했고 일제 강점기를 막지도 못했다는 것이죠. 고종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하나 그 시절을 살아낸 많은 민초들의 어려움에 비할 바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민초들의 아픔에 비해 지금 복원된 고종의 길은 너무나 당당해 보이고 깨끗하며 화려합니다. 이 길은 아픔의 길이지 기념하는 곳이 아니다는 컨셉이 바탕이 되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